티스토리 툴바



  <초국적 도시이론>에서 스미스는 '도시이론'이라는 제목이 함의하는 바와 같이, 기존의 하비, 사센, 카스텔 등 주요 도시이론가들의 세계의 중심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시티담론, 이분화된 지구화와 지역에 대한 논의를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지역으로서의 일반도시들,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 담론적으로 또한 초국적 네트워크로로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장소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스미스가 사센이나 프리드먼을 비판하는 지점(경제환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초국적 네트워크에 대한 무비판적 시각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책 요약을 그만하고 읽은 내용을 좀 곱씹으며 도시 '서울'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글로벌 시티 서울
 
 서울시는 서울시 홈페이지에서 '서울'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대표브랜드'로 수식하면서 그 내용들로 '경제산업 특별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인재가 배출되는 곳', '대한민국 문화예술 1번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서울시는 '시민이 행복한 서울', '세계가 사랑하는 서울'로 삶의 질 제고와 도시경쟁력 강화를 시정 목표로 정해두고 있다. 서울이 어떤 도시이며 어떤 도시가 될 것을 지향하는지는 바로 이러한 방식-한 국가의 수도로서의 역할, 서울시 정책, 시정, 정치적 판단 등으로 알게 된다. 그런데 누가 서울을 재현하며 그 비전-어떤 도시가 좋은 도시인지를 제시하는가. 내가 사는 도시 서울을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으며 어떤 도시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지금의 지배적 서울에의 재현과 비전은 어떤 식의 담론투쟁과 경합을 통해 만들어지는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로서의 도시는 <초국적 도시이론>에서도 이야기하듯이 단순히 경제적 필요, 정부 정책 혹은 정치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광장에서 이루어졌던 광우병과 관련된 촛불집회, 무참한 재개발에 반대하는 용산, 명동에서의 '장소' 점거 시위, 무상급식 불투표와 서울시장 재보선에 이르기까지 서울 시민이자 한국 국민으로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장소로서의 서울에 대해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열한 일들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라거나 시류에 휩쓸린 일시적 유행 담론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초역사적 사건들이 아니고 탈공간적 사건들이 아니다. 오히려 눈부신 한강의 기적을 이룬 근대화(에 대한 찬양, 개발독재)의 역사와 공간 속에 있다. 그리하여 경쟁력 있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수도로서, 세계 유수 도시들과의 어깨를 나란히 해야만 하는 강박을 가진 도시로서 서울은 디자인 수도, 세계인이 좋아하는 도시, 투자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진 것으로 재현되는 도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개입이었다.   여기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재현되는 서울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장소로는 어떠한가, 사람들의 장소라는 점에 대한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서울을 세계 도시/글로벌 시티로 만들기 위한 정치, 역할은 어땠는가. 청계천 재개발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성이 행복한 도시, 디자인 수도, 한강 르네상스 등 일련의 최근에 이르는 서울 시정은 무상급식문제와 오세훈 시장의 퇴임과 전혀 상관이 없는가? 또한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주요 이슈는 무상급식, 재개발, 주거, 한강 등 서울시민들의 장소투쟁의 면모이기도 하지 않은가?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박원순이 주거권을 내세우는 것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장소 투쟁은 도처에 깔려 있다.
 이는 다시 누가 서울을 장소로 전유할 수 있는가 그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 또한 그 권리는 늘 경합하고 투쟁하는 것임을 이야기해야 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 행복한 도시, 재개발 정책 등을 바라보면 서울시가 바라보는 서울 시민 여성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하이힐을 신는 여성, 결혼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아닌가? 여행 프로젝트 기획 단계에서 하이힐이나 화장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주거권을 안정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대한 반박으로 여성들의 주거권이 안정화되면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저출산이 더 심화될 것이기 때문에 미혼 여성의 주거권을 안정화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정책이라는 에피소드는 서울시가 행복한 여성/시민이기를 원하는 여성이 누구인가는 비교적 명백해지며, 그것은 특정 공간에 대한 접근, 사용, 향유에 대한 권리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재개발의 이슈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주거권에 대한 박탈이 국가와 기업자본에 의해 너무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이는 다시 말해 그같이 폭력적으로 재개발 사안을 해결하고자 하는 이유가 그것에 반대하는 저항이 가시적이며 또한 그 정도로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4대강 반대, 강정마을, 명동 카페 마리의 재개발 반대 시위는 분명 힘이 있다.

 도시라는 장소 이슈에서 시민, 시민의 권리, 자격과 같은 것들은 중요한 이슈인 것 같다. 시민의 자격은 영토적이며 곧 경제적이기도 하다. 서울시가 주창하고 있는 외국인이 방문하고 싶고 살고 싶고 투자하고 싶은 금융경제허브, 허름한 뒷골목이 없는 고층 빌딩의 초국적 도시, 서울을 만드는 것은 서울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또한 무엇보다 그 공간이 초국적 글로벌 시티로서 자본과 지식을 가진 세계시민들의 공간으로 재정립될 때 어떠한 문제들이 발생하는가.
 아이와 옹의 <neoliberalism as exception>은 이 같은 거주자, 원주민들의 주권과 세계시민  '등급화된 주권'과 같은 용어를 통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로직이 시민권의 영토를 변경하는지 보여준다. 특정한 지역zone을 설정, 국가와 기업이 그 지역에서 유연한 생산 테크닉을 부여하면서 이주 노동자들 혹은 국내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와 특권은 '시민권'과는 다른 방식으로 배제되고 예외적 존재가 됨을 보여준다. 그 하나의 예로 아시아의 몇 국가, 중국, 홍콩, 싱가폴 등에 대한 사례 분석을 시도하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의 경우에서, zoning technologies, rezoning 등의 단어로서 덩샤오핑의 중국 일부 해안도시의 시장 개방을 설명하고 있다.
 이곳은 중국이라는 국가의 특별 예외적 공간이다. 이러한 지역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촌지역에서 이주해온 여성들이며 이들은 체계적으로 중국의 노동자 연합에서 배제되어 있으며 거주나 교육에 관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이런 식의 재영토화는 기존의 영토국가 내에서 보장받았던, 물론 그것이 실제로 평등하게 작동하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영토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부과된다고 여겨졌던 주권, 자유, 평등의 문제를 특정한 자격에 의해 등급화되는 것으로 재설정한다. 이는 비단 중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한국의 교육, 주거, 노동, 이동 등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서 매일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투쟁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포토시

말하기 2011/07/26 23:35

 EBS 다큐프라임 <안데스> 5편은 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인 <돈키호테>에서 시작한다. 스페인 사회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이 소설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포토시'. 이 다큐는 바로 '포토시'라는 지명에 주목한다.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하비 할배가 하는 말,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는 말을 이 <안데스>라는 다큐는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저 옛날 스페인은 볼리비아 포토시에 조폐국을 만들어 세로리코(포토시의 광산)에서 은이란 은은 죄다 수탈, 은화로 만들어 실어나갔고 이게 바로 유럽의 부 축적, 산업혁명의 발단이 되었단다. 바로 자본주의의 시발이다.

 세로리코는 스페인 침략자들이 그토록 찾던 엘도라도였다고 한다. 스페인 제국주의 시절 약 200여 년간 바로 이 포토시에서 세계 은의 절반가량이 생산되어 유럽으로 퍼날랐다고 하니.. 엘도라도 맞네.. 덕분에 당시 포토시에는 88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도박장도 이곳저곳에 세워질 만큼 유럽 정복자들은 여기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단다.

 이제 볼리비아의 광부들은 50kg에 한화 3000원정도인 아연만을 캐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언젠가 발견하게 될 은에 대한 희망으로, 또한 이 외에는 달리 없는 생계 수단이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광산노동을 계속해서 해나간다. 폭발사고로 죽고 규폐증에 걸리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광부들의 노동을 보고 있자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분노밖에..

 이 다큐는 또한 유럽 제국주의 때의 흑인상품무역에 대해서도 조명한다. 발가벗겨져 흥정에 붙여졌던 흑인 노예. 아프로볼리비아노, 즉 아프리카인이지만 볼리비아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이다. 이들의 조상은 모두 은 채굴과 코카재배에 노예로 동원되었다. 한 흑인여성은 자신의 조상은 콩고에서 왔다고 전해 들었다며 자신의 피는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말한다.

 이들은 불과 50년 전만 해도 노예였다고 한다. 50대 후반인 한 남자는 아홉 살 때 기억을 생생히 들려준다. 동생들을 만나러 갔을 때 동생들이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고 있었다고..

 노예제도는 1952년에의 볼리비아 혁명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비로소 폐지됐단다. 내 엄마 아빠가 태어난 1952년에.

이들은 자신들이 노예로 동원되었던 코카재배를 이제 자신들의 생계수단으로 이어가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인디오들에게 코카를 주면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고 먹을 것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식량 대신 코카를 제공했고, 지금의 볼리비아 광부들은 여전히 코카를 씹으며 광산일을 한다.

요즘 자본론을 다시 읽고 있던 와중 우연히 보게 된 다큐 <안데스>,
어디에나 침탈의 역사는 있고,  그 역사는 계속해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데자뷰처럼 돌아다닌다.
흡사 지금 한진중공업 파업과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최저임금보장 운동에서 본 것처럼.